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레타 섬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전선 형성의 배경은 [[그리스 침공]] 문서 참고. 그러나, 크레타 섬 전투는 좀 더 복잡한 문제들이 끼어들고 있었다. 사실 독일로서는 그리스 침공의 연장선에서 크레타 침공을 결정했지만, 애초에 그리스 전선 자체가 [[이탈리아 왕국|이탈리아]]와 [[베니토 무솔리니]]의 똘끼짓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성되어 강제로 끌려간 측면이 컸고, 안 그래도 [[독소전쟁]]의 준비로 시간과 병력이 빠듯한 상황에서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를 상대하며 크레타 섬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.[* 아래에도 어느 정도 이유가 서술되어 있지만 어쨌거나 크레타 섬 전투에서 추축국이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어 점령은 어찌저찌 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프리카 전선의 상황이 안정권이라고 판단, 독소전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.] 하지만 독일의 최고지도자 [[아돌프 히틀러]]는 크레타 섬을 계속 연합군이 장악할 경우 동지중해의 불침항모가 될 것을 우려했다. 크레타 섬에서 발진하는 영국 폭격기들이 발칸 지역, 특히 독일이 애지중지하는 추축동맹국 [[루마니아 왕국|루마니아]]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를 폭격한다면 독일의 석유수급능력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터였다. 동시에 [[북아프리카 전역]]에 보내야하는 안전한 보급선도 필요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어떻게든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했다. 사실 히틀러의 우려가 틀린 것도 아니었는데 훗날 [[몰타]]가 진짜로 영국의 불침항모가 되어 독일/이탈리아 지중해 수송선단을 끝없이 괴롭혔다. 그런데 사실 영국군은 크레타 섬에 대해서 반쯤은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.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영국과 독일의 결전이 있는 와중이었지만 그만큼 보급이라는 건 양국 모두에 큰 문제였기 때문에 전선의 확장은 난처한 상황이기도 하였다. 영국군 수뇌부 입장에선 그리스 본토에서 발진하는 독일 공군기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. 독일 전투기들, 특히 [[Bf109]]는 [[영국 본토 항공전]]때와 달리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여서 크레타 섬에서의 공중전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, 영국도 이제야 본토 방공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정도의 공군력밖에 확보되지 않았다. 무엇보다 영국으로선 본토 항공전과 달리 사력을 다해 독일 공군과 한판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. 그리고 비록 성가신 [[이탈리아 해군]]을 [[타란토 공습]]으로 침묵시켰다지만, [[Ju 87]]이 돌아다니는 해역을 수상함대로 어술렁거리는건 자살행위였다. 아무리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라도 제공권을 잃어버리면 독일 공군의 밥이 될뿐이었다. 여기에 영국 그리스 원정군도 크레타에서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길 강력 희망하고 있었다. 이는 동시기에 [[북아프리카 전역]]에서 [[에르빈 롬멜]]이 지휘하는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개시, 리비아 대부분을 뺏기고 [[토브룩]]을 간신히 사수하는 와중에서 반격을 위한 추가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. 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시수상 [[윈스턴 처칠]]은 히틀러와 똑같은 생각, 즉 '크레타 섬을 어떻게든 유지하면 불침항모로 굴리면서 폭격기를 띄워 루마니아 플로에슈티 유전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겠지? 그리고 잘만 하면 이탈리아 본토나 남부 독일도 두들겨팰 수 있겠지?'란 생각으로 크레타 섬 사수를 지시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